나는 좀 바쁘게 산 편이다. 중고등학교 때는 군소리 없이 공부만 했고, 대학에서는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학교생활에 충실했다. 졸업하기도 전에 회사 생활을 시작했고, 결혼도 남들보다 조금 빨리 한 것 같다. 결혼 다음 해 태어난 아이는 이제 나보다 키가 크다. 지금은 세 식구가 매일 매일 지지고 볶고 잘산다. 그러다 보니 이제 남녀 간의 사랑이니 로맨스니 하는 단어가 끼어들 구석은 내 삶 어디에도 없는, 그런 단단한 일상들의 반복이다.
그렇다. 단언컨데, 내 삶에 로맨스 따위는 이제 없다. 내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회사에도 사랑 따위는 없다(있어서도 안 된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우연히 생겨도 설렐 필요조차 없다. 어디서 우연히 평생을 꿈꿔오던 이상형을 만난다 한들, 문득 문득 궁금할 때도 있는 그 옛날 첫사랑을 마주친다 한들···. 아는 척 않고 스쳐지나가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요컨데, 내가 사랑한다면 그건 사회의 룰을 어기는 행동이 될 것이다(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범법행위였다). 다행히 나는 그럴 용기를 잃어버린지 이미 오래다. 아마도 지금처럼 순탄하게 살려면 내 안의 사랑 스위치는 스스로 끄고 사는 게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이런 사십대 중반의 아저씨에게 아주 아주 가끔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오직 TV 속 드라마뿐이다. 다행히 남극의 빙하 속에 꽁꽁 얼려있는 사랑의 추억을 끄집어 낼 정도로 강렬하지는 않다. 왜냐면 드라마 속에서는 늘 외모로 전국민 상위 2%는 되보이는 선남선녀들이 등장하고, 나로서는 감히 시도해볼 수도 없었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는 사랑을 하며, 남자 주인공은 최소 대기업 실장급 이상이고, 우연히 만난 사람들인데도 혈연에 악연에 엮인 게 쓸데없이 복잡해서 나에게는 그야말로 전혀 공감이 안 되는 허상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드라마는 나처럼 사랑이 불법인 아저씨들에게 사랑의 추억을 선물하기보다, 아직 사랑이 합법인 청춘들들을 위한 판타지물인 것 같다. 어쨌든 모두에게 공허한 건 마친가지지만, 드라마가 사랑의 교본이거나 매뉴얼은 아니니까. 큰 불만은 없다.
오늘 보니, 헬스장 가는 길에 있는 소공원 목련꽃들이 한꺼번에 져있었다. 바닥에는 까만 멍이 든 하얀 목련꽃들이 나뒹굴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무심한 발자국까지 고스라니 하얀 목련에 새겨져 있었다. 공원 바닥은 온통 지저분했다. 내 주먹보다 커다랗고, 새하얗게, 생명력 넘치던 목련은 매년 그렇게 한순간에, 한꺼번에 ‘죽는다’. 누군가는 이런 지져분한 죽음 때문에 목련을 싫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죽음 때문에 목련이 좋다. 피어야 할 순간에 가장 아름답게 피고, 한창일 때는 질 때의 초라함에 괘념치 않고, 절정만을 향해 온 힘을 다하다가, 지고 나서는 초연하게 거리를 나뒹구는 목련이, 나는 좋다. 문득 바닥에 나뒹구는 목련을 보며 비로소 나는 까맣게 잊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들을 하나 하나 떠올렸다.
그래, 나도 꽤나 멋진 사랑을 했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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