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내방 벽에 걸린 달력은 3월이다. 볼 때마다 이미 흘러간 날들의 의미없는 숫자들이 흩어져 있다. 그럼에도 난 종이 한 장 뜯어낼 의사가 없다. 그렇게 무력하게 이미 4월도 반이나 흘러갔다. 지난날들은 단지 잊혀진 것만이 아니다. 나에겐 이미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추억은 그저 억지로 생산된 싸구려 기념품. 징징거리고 싶은 마음도 자랑할 것도 나는 없다. 잃어버린 것이 아까워 굳이 남들이 못 본 것을 보고 싶은 수고도 귀찮다. 그냥 하루 하루 내게 주어진 만큼만 생각하며 살았다. 고민도 없었다. 그래서 남은 것도 없다. 뒤엉킨 폴더 안에, 어쩌면 찢어진 헝겊 조각 같은 기억이 몇 byte 정도 버려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조차 없었다면 제로와 같았을 삶. 그 사랑마저 영원하지는 않을 터. 파렴치할 만큼 겸손한 기형도를 읽은 밤, 그냥 잠자리에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두려운 마음에 몇 줄을 남기고, 그래도 모자라 성냥을 그었다. 담배 한 개피 타들어 가는 배고픈 밤. 지난 달력을 뜯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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