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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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끝났지만 소년은 다른 아이들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보통은 먼저 친구들이 있나 하고 운동장을 서성였다. 함께 놀 만한 아이들이 없는 날은 운동장 구석 작은 연못으로 갔다. 흐리멍텅한 수면 위로 보일락 말락하는 주황색 물고기 등지느러미를…
나는 좀 바쁘게 산 편이다. 중고등학교 때는 군소리 없이 공부만 했고, 대학에서는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학교생활에 충실했다. 졸업하기도 전에 회사 생활을 시작했고, 결혼도 남들보다 조금 빨리 한 것 같다. 결혼 다음 해 태어난…
올해도 세 식구를 위한 김장을 했다. 나는 속을 버무리고, 그순간 시집 간 누나들에게 전화가 왔다. “왜 이렇게 일찍 해? 하기 전에 전화하지…” 똑같은 레파토리에 “됐거등!”이라고 대답했다. 속을 넣으며 어머니는 작년에도 하셨던 똑같은 옛날이야기…
배추머리에 열십자로 칼집을 내서 쭉쭉 쪼개는 것이 내 역할이다. 벌써 집안 가득 배추향이 진동한다. “세 식군데, 사먹지!” 아들은 쪼그려 앉아있는 게 싫어 기어이 군소리를 한다. “누나들도 줘야지….” 어머니 손이 더욱 빨라지신다. 그러나 누나들은…
아직도 내방 벽에 걸린 달력은 3월이다. 볼 때마다 이미 흘러간 날들의 의미없는 숫자들이 흩어져 있다. 그럼에도 난 종이 한 장 뜯어낼 의사가 없다. 그렇게 무력하게 이미 4월도 반이나 흘러갔다. 지난날들은 단지 잊혀진 것만이…
<데미안>을 읽다가 좀 거슬렸던 부분은 데미안의 ‘초인적인 능력’에 대한 묘사였다. 데미안은 독심술을 할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을 조정할 수도 있다. 또 어떨 때는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과 텔레파시도 가능하다. 그런…
며칠 전 후배가 돌연 회사를 관두겠다고 했다. 몸이 안 좋아서 휴가를 내 병원에 간다더니, 그날 오후 바로 전화로 퇴사를 통보했다. 입원 치료와 함께 오랜 기간 안정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우선은 요즘 취업난이 심하니 병가를…
월요일 출근길 무심코 눈이 간 길섶에 달팽이 한 마리가 있었다. 가던 길 멈추고 나는 달팽이 앞에 쪼그려 앉아 한참 동안 친구를 바라봤다. 어릴 적 손 위에 올려놓고 더듬이 톡톡 건드렸던 그 모습 그대로…
“애앵-“ 소름끼치는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 허를 찔렸다. 지금 9월초다.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하다. 여름은 끝났고, 끝났어야 했다. 모기 같은 놈들은 입이 삐뚤어져 죽었던가, 인간이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모두 사라졌어야 하는 때다.…
삼 천 원을 주고 산 쓰레빠는 고작 한 달을 버텨내었다. 퇴근길에 동네 신발가게를 들렸다. 대충 둘러보고 튼실해 보이는 놈 하나를 골랐다. 주인 아주머니는 만 원을 불렀다. ‘깍아주는 티라도 내주십사.’라는 내 뻔뻔한 청탁에 아주머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