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끝났지만 소년은 다른 아이들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보통은 먼저 친구들이 있나 하고 운동장을 서성였다. 함께 놀 만한 아이들이 없는 날은 운동장 구석 작은 연못으로 갔다. 흐리멍텅한 수면 위로 보일락 말락하는 주황색 물고기 등지느러미를 아무말 없이 꽤 오래 동안 바라봤다. 그러다 학교 전체가 갑자기 적막해 지는 순간이 왔다. 살짝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한쪽에 부려뒀던 먼지 앉은 가방과 실내화 주니머를 급히 챙겨들고 집으로 향했다.
열쇠는 현관 옆 화분 아래나 장독 뒤쯤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늘 불이 꺼있는 방 한가운데 앉은뱅이 밥상이 오도카니 놓어있었다. 언제나 하얀 쌀밥에 김치, 그리고 달걀옷을 입힌 분홍 소시지 부침이 놓여 있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밥은 차갑다. 겨울에는 밥공기를 아랫목 이불 안에 넣어놓지만, 그래도 차갑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소시지 반찬이었지만 늘 남겼다. 먹다 만 밥상은 다시 원래대로 상보를 덮어놓았다.
밥을 먹고 나면 소년은 숙제부터 한다. 엄마와의 약속이다. 숙제가 있는 날은 숙제를 하면 됐다. 하지만 숙제가 없는 날은 텔레비가 시작하는 5시 30분까지 딱히 할 일은 없었다. 혼자 있는 집은 더 넓어 보였다. 소년에게 넓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안방에 누워 뒹굴 뒹굴 하며 이런저런 공상을 했다. 나중에 꼭 갖고 싶었던 장난감과 함께 놀고, 만화 속 주인공과 모험을 떠났다. 한바탕 상상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머릿속에서 많은 질문들이 흘러왔다 흘러갔다. 그런 것들은 흐물흐물 검은 연기처럼 실체는 없었다. 어떤 생각을 할 때는 가슴 한켠이 갑갑해질 때도 있었고, 배가 스륵스륵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니란 것을 소년도 알고 있었다.
방바닥을 뒹구는 것도 지겨우면 누나 방에 가서 고등학교 교과서를 봤다. 소년의 교과서에는 없는 세상 이야기가 신기했다. 오래 읽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미술책은 달랐다. 글씨가 별로 없었다. 대신 이쁜 그림들이, 소년의 미술책에 나오는 것보다 더 멋진 그림들이 많았다. 그래서 미술책이 가장 좋았다. 소년의 책은 학년마다 하나씩 주는데, 왜 고등학교 미술책은 1, 2, 3권이 없는지 아쉬웠다. 누나 책상에서 허락없이 이면지를 꺼내서 그림들을 따라 그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그림들은 여러 번 따라 그렸다. 시간이 제일 잘 갔다.
엄마가 올 시간이 되면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해가 짧아지면 정류장까지 가는 길은 어둡고 길었다. 조금 무서웠다. 그래도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엄마를 마중나갔다. 새벽 5시에 일을 나간 엄마가 집에 올 때면, 양손에 항상 무언가 크고 작은 짐들이 들려있었다. 소년은 엄마 손에 들려있는 짐 하나를 뺐었다. 엄마는 늘 “괜찮다”고, “너한테는 무겁다”고 하셨다. 그래도 소년은 그 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했다. 낑낑대면서도 콧노래를 부르며 엄마보다 앞서 갔다. 행복에 취한 소년은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을 볼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소년과는 달리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는 가슴 한편이 먹먹해져왔다. 어떤 날은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기도 했었지만, 이내 삼켰다. 대신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빨리 따뜻한 밥을 지어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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