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혈전

“애앵-“

소름끼치는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 허를 찔렸다. 지금 9월초다.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하다. 여름은 끝났고, 끝났어야 했다. 모기 같은 놈들은 입이 삐뚤어져 죽었던가, 인간이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모두 사라졌어야 하는 때다. 그런데 오늘밤 느닷없시 그 소리를 들었다. 순간 온몸이 움츠려들고, 소름이 돋았다. 그때는 잔뜩 찌푸린 표정이었을 것이다. “끄응”하고 아주 낮고 느린 감탄사를 내뱉었다. 눈에 힘을주며, 억지로 몇 번 깜빡거렸다. 시계를 봤다. 새벽 3시. 왠지 11시, 12시 언저리께만 됐어도 이런 허망한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숨을 한번 푹 내쉬고, 머리맡에서 핸드폰을 더듬어 찾았다. 아무말 없이 후레시를 켜고 벽과 천장을 차례차례 비추기 시작했다.

내일은 부산으로 출장을 간다. 꽤나 중요한 미팅이 있다. 두 군데를 방문할 예정이다. 이리저리 동선을 고민해서 구입한 기차표는 7시에 서울역을 떠난다. 집에서 한 시간, 준비하는 데 한 시간, 역산해본다. 5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아침밥 대신 잠을 좀더 자기로 한다. 그래도 일찍 나가야한 한다. 퇴근 후 근무하면 추가수당이라도 받는데, 아침에는 왜 그런 것도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든 말든 알람을 5시 30분에 맞췄다. 내일 회의 자료를 챙기고, 노트북과 보조 배터리를 가방에 넣었다. 아무리 부산을 떨어도 출장 전날에 여유로웠던 적은 없었다. 미팅이 끝나고 늦게까지 술자리가 이어질지도 모른다. 갑자기 부담이 몰려왔다. 서울행 막차가 몇 시인지 살펴봤다. 의외로 새벽까지도 있었다. 그렇게 빨리 자야지 하고 침대에 누운 게 12시였다.

벽 하나 하나를 비췄다. 천장도 비췄다. 책상 아래 어두운 곳도 살펴봤다. 귓바퀴가 뜨거우면서 가려웠다. 여기 물렸나보다. 오른쪽 발가락 쪽도 간지러웠다. 그런데 어느 발가락을 물렸는지 딱 찝지를 못하겠다. 발가락 전체가 의뭉스럽게 간지러웠다. 어쩌면 발바닥을 물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발끝부터 독이 퍼지듯, 기분나쁜 간지러움이 온몸으로 퍼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1차 시도는 실패. 어쩔 수 없이 다시 누웠다. 하지만 이미 잠은 살짝 도망간 상태였다. 깬 김에 괜히 메일을 확인했다. 페이스북도 잠간 봤다. 부산역에서 약속장소까지 가는 길도 한 번 더 찾아봤다. 그러다 아차 싶어 핸드폰을 치우고, 다시 눈을 감았다. 나도 모르게 한동안 모기 소리가 들리지 않나 초집중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하지만 분명히 모기는 이 방 안에 존재한다. 명백한 사실이며,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분한 마음에 스프링처럼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플래시를 켰다. 2차 수색을 펼쳤다. 더 샅샅이, 꼼꼼히, 경솔하지 않게, 최선을 다해 온 벽을 10cm 단위로 훑었다.

문 바로 옆에서 그놈이 포착됐다. 강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도 꿈쩍도 안했다. 뭐가 저리 당당하지?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능청맞은 놈. 기회는 한 번뿐이라는 것을 인생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오른손으로는 각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익숙치는 않지만, 대범하게 왼손으로 일격을 가할 각도를 잡았다. 원래 맨손으로 벌레를 잡는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이순간 개의치 않았다. 사격선수처럼 잠시 목표물을 집중해서 노려봤다. 그리고 숨을 10초가량 참았다. 내 몸의 리듬을 느꼈다. 이때다 싶은 찰라 빠르고 정확하게 벽을 때렸다. 들리는 소리는 “짝!”이었지만, 손바닥으로 느낀 소리는 “퍽!”이었다. 피가 터져나와 벽에 뿌려졌다. 내 피였다. 나는 마침내 피의 복수에 성공했다. 갑자기 가슴이 시원해졌다. 뭔가 기분좋은 호르몬이 몸속에서 2, 3회 쫙쫙 뿜어져나오는 느낌이었다. 방금 일을 저지른 영화 속 살인마처럼 나도 모르게 살짝 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보니 새벽 4시다. 고놈의 작은 모기 새끼 한 마리 때문에 잘자긴 글렀다. 내일 미팅을 망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문득 겁이 났다. 갑자기 나폴레옹도 운명의 전투를 앞둔 날 밤,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치고, 다음날 엉망인 콘디션으로 전장에 나선 적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인슈타인처럼 똑똑한 과학자인들, 한밤중 내방에 침입한 작은 무법자에 대항해 뭘 어쩔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고 보면 세상 일 계획대로 되는 게 참 없다. 복수혈전 끝에 인생의 불확실성을 새삼 느꼈다. 뭔가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다시 누웠다. 어쨌든 복수는 했으니까. 이제는 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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