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을 읽다가 좀 거슬렸던 부분은 데미안의 ‘초인적인 능력’에 대한 묘사였다. 데미안은 독심술을 할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을 조정할 수도 있다. 또 어떨 때는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과 텔레파시도 가능하다. 그런 부분들이 나에게는 좀 허황되게 들렸다. 데미안의 비범함을 나타내기 위한 ‘무리한 과장들’이 아닌가 싶었다. 데미안의 친구는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캐묻는다. 물음에 대한 시원한 대답이 딱히 돌아오진 않지만, 꽤나 그럴법한 설명 하나가 기억난다. 싱클레어의 질문에 데미안은 “그렇게 할 수는 없어. 다른 사람 쪽에서 원하는 생각을 할 수도 없거니와 내 쪽에서 원하는 것을 그가 생각하게 만들 수도 없어.”라고 잘라 말한다. 대신 “그러나 누군가를 잘 관찰할 수는 있는 것 같아. 그가 다음 순간에 무얼 하게 될지 말이야. 그건 아주 간단해, 사람들은 그걸 모를 뿐이야.”라고 말해준다.
대학 다닐 때 명상과 단전호흡을 열심히 하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 친구는 일부러 며칠씩 밥을 안 먹어보기도 하고, 때론 생식만 하기도 하고, 잠을 극심하게 줄여보기도 하며 자신의 몸에 여러 가지 ‘생체실험’을 했었다. 그 친구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도 데미안처럼 “나는 내 몸을 관찰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관찰은 왠지 꽤나 중요한 ‘인간의 의무’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책에서나 ‘관찰’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울 뿐(또는 남들이 한 관찰을 글로 외울 뿐), 학교를 포함한 거의 모든 ‘사회화 기구’들은 관찰을 안 해도 잘 살 수 있는 세상의 ‘관행’과 ‘룰(rule)’만을 가르친다. 그러니 자라다 보면 관찰과는 점점 멀어진다. 게다가 요즘 세상에서는 지식마저 관찰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제 지식은 ‘검색’에서 나온다(조금 있으면 AI에게서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점점 나에게서 관찰 본능과 능력이 퇴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역시 관찰은 중요하다. 데미안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데미안은 ‘짝짓기를 위해 먼 곳에서부터 엄청나게 발달된 후각을 이용해 암컷을 찾아오는 수컷나방’의 예를 든다. 그는 “수컷들에게 그런 예민한 코가 있는 것은 다만, 스스로를 그렇게 조련시켰기 때문인 거야. 어떤 짐승이나 사람이 자신의 모든 주의력과 모든 의지를 어떤 특정한 일로 향하게 하면, 그는 그것에 도달하기도 하지. 그게 전부야. 네가 알고 싶었던 일도 정확하게 그래. 어떤 사람을 충분히 자세히 바라봐. 그에 대해서 그 자신보다 네가 더 잘 알게 돼.”라고 말했다.
데미안의 말처럼 관찰이 그런 효용이 있다면 나는 우선 나부터 ‘관찰’하고 싶다. 그래서 제발이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조금이라도 알게 됐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블로그는 나의 관찰을 기록하는 공책이다. 어려운 이야기를 쓸 것도 없고, 교훈이 되는 이야기를 쓸 필요도 없다. 남을 위한 글을 쓸 필요도 없고, 나에게 변명하는 글을 쓸 필요도 없다. ‘나를 관찰하면서 느끼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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